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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梁(良)양씨의 氏族(씨족)의 연원



우리나라의 모든 梁氏(양씨)의 始祖(시조)는 耽羅國(탐라국) 개국설화의 三神人(삼신인) 중 한사람인 良乙那(양을나)이다. 太古時代(태고시대)에는 濟州道(제주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한라산 북쪽 기슭 땅 속에서 三神人(삼신인)이 솟아나와 인간으로 化生(화생)하였다. 이곳이 바로 三姓穴(삼성혈)이라 불리는 毛興穴(모흥혈)이며 삼신인 중 맏이가 양을나, 둘째가 고을나, 셋째가 부을나 이다. 이때는 檀君創業(단군창업)과 同時代(동시대)의 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唐堯(당요)9년이라고 舊譜(구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有史(유사)이전의 일이라 考證(고증)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三神人(삼신인)은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살았고, 짐승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어느 날 東海(동해)에서 기이한 나무상자가 떠내려 와 가서 열어보니 무지갯빛 광채 속에서 아리따운 세 처녀와 오곡의 씨앗과 가축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삼신인(삼신인)은 세 처녀와 각각 결혼해서 살았으며 그 중 맏이인 良乙那(양을나)가 耽羅國(탐라국)을 개국하여 王(왕)에 즉위하였고 양을나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良乙那(양을나) 始祖(시조)의 遠孫(원손)인 양탕(梁宕)이 廣巡使(광순사)로 서기373년 신라 내물왕18년에 星主王子(성주왕자)의 爵號(작호)를 받아 신라국에 입조하였고 그때 개양성위양(改良姓爲梁) 즉, 良(양)을 梁(양)으로 賜姓(사성)하여 梁(양)씨를 쓰게 되었으며 또한 梁宕(양탕)의후예인 양자영(梁自瀛)이 신라 경덕왕 때에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게 되면서 제주양씨에서 남원양씨로 관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제주양씨에서 분적한 성씨로, 丁酉(정유)년, 서기757년(경덕왕 16년)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진 뒤 후손들이 남원양씨로 분적하였다. 남원양씨는 후대에 兵部公派: 梁能讓(병부공파:양능양)와 龍城君派:梁朱雲(용성군파:양주운)로 나뉘는데, 병부공파가 남원양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1985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8만1,124 가구에 인구 34만 3,985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25위였다.

종중의 대표적 인물로는 高麗王朝(고려왕조) 초기, 광정대부(종2품) 판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한 양견(梁堅), 동국의 백이숙제라 불리운 양우(梁祐) , 朝鮮王朝(조선왕조)의 세종조를 거쳐 세조조에 이르기까지 이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종1품)를 지낸 梁誠之(양성지/문양공)가 유명하다.


삼성사(三姓祠)



삼성사(三姓祠)는 탐라국(耽羅國)의 시조(始祖)이고 제주도의 최초 주인인 양(良), 고(高), 부(夫) 삼신인(三神人)이 종지용출(從地湧出)하신 성지(聖地) 삼성혈(三姓穴)에 있는 사당(祠堂)으로 현재 국가지정 사적지 제13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아득한 옛날 이 땅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 땅에서 양(良), 고(高), 부(夫) 삼신인(三神人)이 지중(地中)에서 종지용출(從地湧出)하여 수렵생활로 피의 육식(皮衣肉食)을 하다가 하루는 오곡(五穀)의 씨앗과 가축(家畜) 등을 갖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삼공주(三公主)를 맞아 각기 배필(配匹)을 삼음으로써 제주도에 처음으로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마련,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오늘의 발전을 있게 하였다.

혈단(穴壇) 내 3개의 동굴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당 부분 매몰되어 있으나 사적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증가되어 최근에는 해마다 50여만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삼성사(三姓祠)에서는 해마다 세 번의 제사를 모시고 시조(始祖)의 높은 뜻과 그 얼을 기리고 있는데 이곳이 성지(聖地)로 지정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삼성사(三姓祠)의 조성은 서기 1526년(중종21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수동(李壽童)이 삼성혈(三姓穴) 혈단(穴壇) 둘레 280여 척(尺)에 돌담을 쌓고 북쪽에 홍살문과 혈비(穴碑)를 세워 삼성(三姓)의 후예(後裔)로 하여금 춘추제(春秋祭)를, 매년 동짓달 상정일(上丁日)에는 도민들로 하여금 제사(祭祀)를 모시도록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 서기 1699년(숙종 25년) 정월(正月)에 대정현감(大靜縣監) 송래백(宋來相)이 삼성묘(三姓廟) 상량문(上樑文)과 삼성단(三姓壇) 사우기(祠宇記)를 쓰다.
● 서기 1702년(숙종 28년) 3월 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가 가약천(嘉藥川) 동쪽으로 삼성사우(三姓祠宇)를 옮겨 짓고 상량문(上樑文)을 완성하였는데 위패순위(位牌順位)를 삼신인(三神人) 강생(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 등 갖가지 기록을 널리 상고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에 모셔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祭祀)를 올리다.
● 서기 1710년(숙종 36년) 최계옹(崔啓翁) 목사(牧使)가 신위(神位) 판(板)에 부군(府君)이라는 두 글자를 을나(乙那)로 고쳐 쓰다.
● 서기 1740년(영조 16년) 3월에 목사(牧使) 안경운(安慶運)이 수직생(守直生) 40인을 뽑아 교대로 수직(守直)케 하고 도민 중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재장(齋長)을 삼는 한편, 장의(掌議) 한 사람과 유사(有司) 한 사람을 두는 제도를 만들었다.
● 서기 1772년(영조 48년) 양세현(梁世絢) 목사(牧使)가 삼성사(三姓祠) 담장을 새로 증축하고 나무를 심었으며 선흘(善屹), 조천(朝天), 와산(臥山) 등지에 있는 위토(位土)를 사들여 향청(鄉廳)으로 하여금 그 수호(守護)와 제사(祭祀)를 주관하도록 하다.
● 서기 1785년(정조 9년) 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 고경정(高擎井) 등이 임금님께 글을 올려 삼성묘(三女廟)에 사액(賜額)을 내려주도록 청하니 모든 대신들이 의논한 뒤 왕께 아뢰어 윤허가 내려졌고 예문관에서 올린 액호 삼성사(三姓祠), 삼을사(三乙祠), 삼령사(三靈祠)중 삼성사(三姓祠)가 낙점되어 예관 고택겸(高宅謙)을 보내어 사액(賜額)하다.
● 서기 1849년(헌종 15년) 장인식(張寅植) 목사(牧使)가 숭보당(崇報堂)을 짓고 기숙생(寄宿生) 15명을 두어 학문을 연구하게 하다.
● 서기 1865년(고종 2년) 제주목사(濟州牧使) 양헌수(梁憲洙)가 경내에 나무를 많이 심고 용담동 등에 있는 위토(位土)를 사서 희사하는 등 크게 공헌하다.
● 서기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사우(祠宇)가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다. 서기 1873년(고종 10년) 제주에 유배 와 있던 최익현(崔益鉉) 등의 상소가 있었으며 서기 1890년(고종 27년) 정언(正言) 고경준(高景晙)이 삼성후손(三姓後孫)들과 협의한 끝에 모흥단(毛興壇) 동쪽에 사우(祠宇)를 새로 짓고 혈단비(穴壇碑)를 마련하니 삼성사(三姓祠)는 훼철(毁撤)된지 19년 만에 옛 모습을 되찾고 삼을나(三乙那)의 신위(神位)도 다시 봉안(奉安)케 되었다.
● 서기 1907년(순종 원년) 삼성사우(三姓祠宇) 수호(守護)와 향전을 제주군청에서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 서기 1910년 참사 양익룡(梁翼龍) 등이 삼성사(三姓祠) 관리권을 제주군청으로부터 인계받아 사우(祠宇)와 전사청(典祀廳), 숭보당(崇報堂), 수복청(守僕廳), 담장 등을 중건하고 화초를 많이 심어 주위 환경을 일신시켰다.
● 서기 1919년 삼성대표(三姓代表)의 합의 하에 사우(祠宇), 숭보당(崇報堂), 단직사(壇直舍)를 증수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준공하고 그 해 12월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三姓始祖祭祀財團) 설립을 결의하여 서기 1921년 11월 10일 정식인가를 받았다.
● 서기 1964년 6월 10일 삼성혈(三姓穴)이 국가 지정 문화재(사적 134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친 삼성사(三姓祠)는 근년에 와서 제주시 이도동에 삼성회관(三姓會館)까지 건립하여 삼성(三姓)의 도 종친회(道 宗親會)사무실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사(三姓祠)에서는 4월 10일의 춘계대제(春季大祭), 10월 10일의 추계대제(秋季大祭), 12월 10일의 건시대제(乾時大祭) 등 연 3회에 걸쳐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는데 춘추(春秋) 2회의 대제(大祭)는 후손(後孫)들이, 건시대제 (乾時大祭 즉 혈제-穴祭)는 도지사를 초헌과(初獻官), 그밖에 도내 기관장과 도민 대표가 아헌관(亞默官), 종헌관(終獻官)을 맡고 있다.


개사성조(改賜姓祖) 양탕(梁宕)



건승원(乾承原)의 조성(造成)
여기 선택된 땅 아늑한 고지에 양문(梁門)의 뜻을 모아 근묘화실(根描花實)의 인도지상(人道之常)을 몸소 실천하시어 양문(梁門)의 뿌리를 튼튼히 다진 중시조(中始祖) 휘(韓) 탕(宕) 선조(先祖)의 위업을 기리는 건승원(乾承原)을 조성(造成)한다. 인지(人智)가 채 발달하지 못한 아득한 옛날에 지혜와 용기의 진취적 기상으로 신천지를 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굽이쳐 흐르는 역사의 현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종문(宗門)의 흥업을 널리 심어주신 탐라국주(耽羅國主) 휘(諱) 탕(宕) 선조(先祖)의 위대한 업적은 양문(梁門)의 전통을 이어 이제 종사(宗史)의 구심점으로 종인(宗人)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탐라국(耽羅國)을 개국하신 양을나(良乙那) 성왕(聖王)의 후예(後裔)로서 그 위상을 드높여 자손만대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기 위함이다.

신화시대 이후 유장(悠長)한 세월에 걸쳐 우리 양문(梁門)은 숱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서 인본(人本)을 다한 것은 휘(諱) 탕(宕) 선조(先祖)의 높으신 은혜임을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휘(諱) 탕조(宕祖)께서는 내물왕 19년(374) 신라에 입조하시어 공적 선린외교를 도모하실 때 신라왕은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청고(淸高)하신 기상과 관아하신 용모에 감복하시어 환대하시고 중상작록(重賞爵祿)과 금수의관을 내리시는 한편, 사성(賜姓)의 전례에 따라 양(良)자 성(姓)을 양(梁)자 성(姓)으로 바꾸어 쓰시도록 하였다.

이제 휘(諱) 탕(宕) 선조(先祖)의 후손後孫)들은 전국에 걸쳐 살고 있으며 제주와 남원과 충주로 분관되어 제주(濟州)는 한라군(漢拏君) 휘(諱) 순(询)후 유격장군(遊擊將軍) 휘(諱) 보승(保崇), 성주공 휘(휘) 구미(具美)를, 남원은 남원부백(南原府伯) 휘(諱) 우량(友諒)후 병부랑중(兵部郎中) 휘(諱) 능양(能讓),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휘(諱) 주운(朱雲), 대방부원군(帶方府院君) 휘(諱) 수정(水精)을, 충주(忠州)는 예성부원군(蘂城府院君) 휘(諱) 능길(能吉)을 각각 기세조(起世祖)로 모시고 있다.

여기 조성된 건승원(乾承原)에 후손(後孫)들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광덕전(廣德殿)에 위패(位牌)를 모시고 다시 추원비(追遠碑)를 건립하여 조상(祖上)의 업적과 발자취를 새기는 것은 날로 퇴색되어 가는 효(孝) 사상을 되찾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도덕의 향기를 후손(後孫)에게 가르치고 일깨워 삶의 지표로 전승시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곳에 모든 종인(宗人)의 예지와 효심(孝心)이 한데 모아져 고금(古今)의 선대(先代)와 후대(後代)를 연결하는 혈맥(血脈)의 가교가 될 것이며 대자연 과 조화를 이루어 이 시대가 이룩한 역사의 유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성지(聖地) 건승원(乾承原)은 양문(梁門)만이 갖은 숭조(崇祖) 위선(爲先)의 장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효(孝)와 인성교육(人性敎育)의 도장으로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것이다.